제가 어렸을 때는 21세기라는 것이 아주 까마득하게 생각되었습니다. 21세기가 되면 제 나이가 얼마가 될까 계산해 봤더니 정확히 만 40세가 됐을 때 21세기의 동녘이 밝게 되는 것을 알고 한편으로는 까마득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에 희망이 차기도 했습니다. 내 나이가 한창일 때 21세기를 맞겠구나.
그러다 어느새 21세기가 왔고 저는 40의 고개를 넘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라고 해서 20세기와 특별해 다른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다만 나이만 먹었을 뿐입니다. 친구들과의 모임을 가질 때 이전에 등장하지 않던 주제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첫째는 자녀 교육의 문제고 둘째는 건강입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나, 어떻게 하면 병에 안 걸릴 수 있나, 이런 얘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십년 전에는 상상도 못한 주제인데, 배가 한번 나오더니 웬만해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급적 둥그런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배가 둥그레질까봐. 그러면서 은근히 불안감을 느낍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 이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닐까?’ 이런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어렸을 때는 꿈이 많아요. 그래서 현재의 문제가 전혀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내가 없는 것에 대해서 전혀 염려하지 않습니다. 없는 것은 앞으로 생기면 되고 못하는 것은 앞으로 하게 되면 된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나이가 먹어갈수록 내 꿈이 다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이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린이의 특권은 어린이는 질문을 하면 대답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나면 남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 줘야 될 의무는 있지만 정작 자기의 질문에 대해서 답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님도 연로하시고 오히려 자식의 도움을 받아야 될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소설책이 좋은 것 중에 하나는 그 끝을 볼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인내가 있는 사람은 그 소설책을 끝까지 읽어 나가면서 어떻게 끝나는지를 볼 것이고 인내가 부족한 사람은 아예 뒤를 먼저 봅니다. 끝을 보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 어떻게 끝까지 읽습니까. 대충 보다가 끝을 보고 마음에 들면 계속해서 책을 읽든지 하는데 우리의 삶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끝을 미리 가서 보고 ‘내 인생이 앞으로 이렇게 되는구나.’ 그걸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면 하루하루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찬송가 가사 그대로입니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네”
영화 ‘할렐루야’를 보면 박중훈씨가 사기꾼으로 목사 흉내를 낸다는 줄거리입니다. 원래 계획은 사기를 쳐서 돈을 가로채는 것이었는데 그만 계획이 빗나가는 바람에 교인들에게 설교도 해야 되고, 상담도 해야 되고, 본의 아니게 목사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코미디 영화인데 그러다가 꼬리가 밟혀서 그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꼼짝달싹할 수 없습니다.
주인공이 저녁시간에 예배당에 앉아서 처음으로 기도다운 기도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 그런데 그 빈 예배당의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에게 말을 합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내가 가장 기뻐했다. 너는 염려하지 말아라. 너는 잘 될 것이다.’ 목사 흉내를 내더니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용기를 얻고 교회 앞에 사과를 하고 담담하게 경찰에게 잡혀가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우리도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너는 염려하지 말아라, 너는 미래를 염려하지 말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네 염려를 나에게 맡겨라, 너는 잘 될 것이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런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듣고자 하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가 있을지라도 실수가 있을지라도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잘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현재 어떤 시련을 당하든지 넉넉하게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흡연하는 분들이 담배가 호흡기에 미치는 부담감을 어떻게 감당하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밤에 춥게 자기만 해도 아침에 일어나면 목이 잠기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상상할 수 없어요. 그런데도 담배를 피우는 분들을 보면 참 궁금하고 또 하나는 외도하는 사람들이 그 스태미나를 어디서 얻을까, 셋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두려움과 불안함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살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어떻게 그 두려움을 하나님 없이 극복하면서 살 수 있을까 참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처음 하시는 말씀이『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실 때 십중팔구 처음 하시는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아라 - be not afraid” 이 말씀입니다. 사람은 두려워하는 존재이고 염려하는 존재이며 근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라, 너희는 근심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두려워 말라’라는 말씀이 365번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사람이 그렇게 근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루에 한 번씩 “두려워하지 말아라, 강하고 담대 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한 다음에 뉴스위크지에 전 미국 국가안보 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라는 사람이 교황에 대해서 쓴 글이 실렸습니다. 교황도 폴란드 사람이고 브레진스키도 폴란드 사람입니다. 교황이 즉위할 때 당시 국가안보 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가 미국 대표로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교황이 대관식 날 즉위한 다음에 교인들 앞에 나와서 제일 먼저 한 말이 ‘두려워하지 마시오.’라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인상이 깊었다고 합니다. 남자는 두려움이 없는 것 같지요? 그러나 남자의 세계에서 힘에 연연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남자의 세계에서 힘, 그것이 완력이든 재력이든 군사력이든 힘에 의존하려고 하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왜 북한이 핵무기에 집착하느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떻게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라고 말씀하셨고 또「악한 자를 악으로 갚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느냐? 그 이유는 예수님에게는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자를 볼 때 악으로 그를 대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든 용서든 이런 것은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때 실천할 수 있는 것인데 그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세상을 이기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너희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이렇게 물어보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이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여쭙기를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중심적인 질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묻든지 심오한 것에 대해 물어야 할 텐데 아브라함은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이렇게 묻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우리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나와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나와 상관이 있다고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그러면서 자신의 고민에 대해서 말하기를『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지금 아브라함이 염려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는데 자식이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이대로 살다가 죽게 되면 누가 나의 후사가 될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초조함입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초조함을 느낍니다. 로마의 시저가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를 읽다가 ‘알렉산더는 나이 서른에 세계를 정복했는데 나는 나이가 오십이 다 되었는데도 이룬 것이 없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사람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초조해집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는데 바라는 것도 시간이 있어야 바라지, 시간이 점점 흘러가면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세상이 내 것처럼 생각되고 내게 없는 것이 전혀 염려되지 않아요. 지금 없으면 나중에 생기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지금 없는 것이 영원히 없을 수 있겠구나 나는 이대로 살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중년의 나이는 inventory-재고정리를 하는 시간입니다. 내게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정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리하고,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할 수 없는 것은 포기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그러면 내게 없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이것은 죽을 때까지 없을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불안한 것입니다. ‘자식이 없는데 내가 죽을 때까지 자식이 없으면 누가 나의 후사가 될까.’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이렇게 그의 생각을 말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지만 이제는 가능한 것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쉰다는 것은 육신이 쉬고 오락을 즐긴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정말 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제가 과거 부목사 시절에 주일 오전예배와 저녁예배까지 마치고 퇴근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얼마나 피곤한지 몰라요. 그때는 지금보다 젊었는데도 너무나 피곤했습니다.
그런데 그 피로가 가실 수 있는 길이 단 한 가지 있었는데 저녁예배 때 은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하죠? 저녁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집에 가면 완전히 파김치가 되지만 은혜를 받으면 피로가 사라져요. 은혜가 이런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더니 그가 말과 병거보다 더 빨리 뛰어갈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할렐루야. 새 힘, 이것이 영적인 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에 힘을 주고 우리의 몸에도 피로를 극복하고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이미 들은 말씀이라도 다시 들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미 과거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하신 말씀을 다시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들은 말씀을 다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응답은 이미 우리가 들은 말씀 속에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탐정 영화, 스릴러를 보면 단서가 이미 들어 있잖아요? 범인이 이미 등장했는데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도 이미 우리가 들은 말씀 속에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양주동 선생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중학생이었을 때 첫 기하학 수업을 듣는 중에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기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한문으로 보면 얼마 기(幾), 어찌 하(何)인데 얼마, 어찌라니요?” 기하학 선생님이 학생이 장난으로 질문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질문하는 것인지 먼저 확인한 다음에 진지하게 질문하는 것을 알고는 기하학이 중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독일어로 게오메트리라고 불렀는데 그것을 소리 나는 대로 한문으로 옮기다 보니 기하가 되었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질문을 할 때 그것이 진지한 질문이 될 수도 있고 불신으로 하는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원망하면서 하는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으로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을 원망으로 하는 질문에는 침묵하시지만 내가 더 잘 믿기 위해 하는 질문에는 대답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내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라고 여쭸을 때 하나님께서『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별들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말씀만으로는 실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청각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네 눈에 보이는 별이 너희의 마음속에 반짝이게 하라.” 이것은 점점 어두워지는 심령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꿈을 꾸게 하시고 그것이 반짝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없는 것은 없는 대로, 있는 것은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는 대로 살지, 더 새로운 것을 바라겠느냐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직 자녀가 하나도 없는데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별처럼 많은 자녀를 너에게 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게 없는 것을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내가 이제껏 전혀 생각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을 꿈꾸게 하시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이유 때문에 위대한 것이고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꿈이라는 것은 젊은 사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이 든 사람이 무슨 꿈을 가질 수 있느냐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이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는 전조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김영준 목사-기쁜소식교회)